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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왕’ 칸트의 꿈과 우리

‘영원한 평화’가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나영철 | 기사입력 2018/12/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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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쾨니히(Konig)는 왕(王)을 뜻하고 베르크(Berg)는 산(山)이니, 현재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는 우리말로 왕산(王山)이 되는 셈이다. 중세시대부터 독일의 옛 도시였으나 지금은 러시아에 속해 있으며 이름도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다.

 

이 도시가 왜 왕산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알기로는 이곳에서 한 위대한 왕이 태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그 왕은 왕국을 통치하는 왕이 아니며, 엄밀히 말하면 ‘철학의 왕(Konig der Philosophie)’의 탄생을 뜻한다. 그가 태어난 때는 1724년이며, 그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다.

혹자는 그에게 황제(皇帝)라고 부름이 바람직하다 할지언정, 칸트를 두고 ‘철학의 왕’라고 칭함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러할만큼 그는 서양 사상사의 전반에 걸쳐왔던 철학의 틀 구조 전환과 철학함의 방법에 극적전환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고대 희랍철학부터 연대별·분야별 철학의 지류(支流)들은 칸트라는 철학호수에 흘러 들어와서 비판-융합-종합되어 또 다시 각각의 다양한 철학의 분류(分流)를 이루어 흘러갔다”는 한 철학교수의 칸트에 대한 업적과 역할평가는 가장 적절한 비유로 공감된다.

칸트의 철학을 두고 “잘 살아보세”의 외침이라고 뚝 잘라서 말한다면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대표적인 ‘3대 비판서’에서 다루었던 과제가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 그리고 추구할 바를 밝히고자 했으니, “잘 살아보자”는 정교하며 단계적인 그 나름의 사유결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칸트는 첫째, 인간과 진리와의 관계를 다루며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인식론의 정립과 형이상학의 재규정을 이뤘다(순수이성비판). 둘째, 그렇다면 부여된 자격으로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잘 살아 갈 수 있을까?’의 방법으로 그의 윤리학이 제시된다(실천이성비판). 셋째, 인간이 궁극적으로 잘 살아야만 하는 이유와 가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희망’과 ‘최고선’을 거론하며 그의 이성종교론과 미학이론이 도출된다(판단력비판).

칸트의 “잘 살아보세”의 외침은 그의 노년시기에 한층 더한다. 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를 저술하며 “모두가 다함께 영원토록 잘 살아보세”를 외친다. 이 책의 표지에서 ‘영원한 평화’라는 실현 불가하며 허구적 느낌을 갖게 될 예비독자들을 배려해서 책제목 옆에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부제를 단 것은 역시 칸트답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상비군 폐지’와 ‘한 국가가 타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무력개입 금지’등의 여러 조항을 제시하며 일종의 ‘평화 조약안’과 같은 구성을 했다.

나영철 한맥논단 지기

필자에게 두드러지는 면은 기존의 전쟁원인을 지배자의 존재 과시놀이에 불과한 전쟁에 희생당하는 피지배자와의 관계로 폭로하며, 전쟁의 결정권을 시민이 갖는 공화정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는 국제연맹 또는 평화연맹을 제시해 훗날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근간이 되게까지 한다.

이러한 칸트의 “다함께 영원히 잘 살자”는 기획의 정점에는 누군가의 의지와 기획에 소유되지 않고 강력하게 계몽된 시민구성원들의 집단 도덕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철학은 ‘독일국민에게 고함’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피히테와 그리고 쉘링에게 전수되었으며, 칸트를 동양의 공자에 비유한다면 독일의 맹자에 준할 수 있는 헤겔에 이르기까지 불과 30년 만에 독일 관념주의 계보가 완성됐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가 저물고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큰 변화와 기회를 맞이했던 2018년이었다. 답보 중인 남북한과 북미관계에서 앞으로의 행보는 그간의 몇몇 정치인들의 결정과 주변국들의 관계지도에만 관망하며 의존할 때가 아니다. 다가오는 2019년에는 새로운 동기를 일으켜 우리 스스로의 단합된 의지로 큰 결실을 얻어내는 때이길 기대한다.

혹시 아는가? 미완성된 칸트가 꿈꾸었던 ‘영원한 평화’가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구현될지를?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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